일본인의 의식 속에 오래 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서기를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의 위협 앞에서 한국을 침략함으로써 강점한 이후에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 근거로 종종 이용되었다. 결국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
임나일본부설이란
1) 6세기의 역사적 상황과 한일관계
6세기의 동아시아 세계는 두 개의 지역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남북조의 중국과 고구려, 백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중 지역세계’의 축이고, 둘째는 신라, 가야 그리고 일본열도의 규슈세력과 야마토정권이 구성하는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일본부’ 를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황당무계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일본 사학자들조차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부’ 는 5~6세기 중엽 무렵에 조선의 임나에 설치되었던 출선 기관으로서, 임나 등을 비롯한 그 밖의 백제․신라
일본 황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진상품을 바치는 신라왕을 그리고 있다. 또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임나’란 지명을 도드라지게 표기하며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하고 있다.
삼한조공을 묘사한 삽화에서는 신라, 고려, 백제 등의 국가 이름을 누차 언급한다. 일본의 소학교 국사 교과서는 1904년부터
임나국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임나국을 중심으로 서부에는 백제계의 분국이, 동북쪽에는 신라계의 분국이, 동쪽에는 고구려의 분국이 위치하였고, 동쪽으로 대화정권(倭)이 위치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백제군사령부설 - 천관우는 가야사의 복원을 염두에 두면서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
신라의 구세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왕건의 부하장병을 중심으로 한 지방호족계 무사군과, 신라에서 귀순해 온 경주귀족계 문신에 의해 두 개의 상이한 세력이 차차 형성되었고 이를 조정한 것이 문무양반제였다. 그러나 양반제도는 두 세력의 상극을 해소할 수 없어서 끊임없는 문무알력이 되풀이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
Ⅰ. 한국과 일본의 관계(한일관계)와 APII(아시아태평양정보기반)
APII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우정성과 함께 통산성의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AII는 우정성의 전관사항(專管事項)이지만 APII는 우정성과 통산성이 동시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측면에 비중을
일본 열도로 보는 등 시각을 달리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Ⅱ. 본론
1. ‘任那’. 그 개념에 대한 정리.
(1)일본 사료에서의 임나
주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6세기의 한반도 남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소국들의 총칭을 가리킨다. 이는